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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네스코위원회] 전설의 시작, '최동원 특집 1편' | KBS 방송

soures 2025. 1. 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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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네스코위원회] 시리즈의 최동원 특집은 한 시대의 야구 영웅을 기리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최동원선수의 업적, 그의 정신력과 희생은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의 독특한 투구폼과 승부사적 기질이 패배를 초월하게하며, 부산시민들에게는 그의 존재가 큰 자부심이자 상징입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 방송에서 최동원선수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이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최동원선수는 단순한 선수 이상으로, 부산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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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최동원과 부산 야구의 상징 [00:00:00] (6분)

  • 최동원선수는 부산을 대표하는 야구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투구 폼과 모습은 타자들에게 큰 긴장감을 주었다.
  • 그는 단순한 선수의 역할을 넘어서 부산시민들에게 도전과 열정의 아이콘으로 기억된다.
  • 부산에서는 최동원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며, 시민 모두가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2. ⚾ 최동원과 70년대 고교 야구의 열기 [00:06:36] (2분)

  • 70년대 고등학교 야구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그 열기는 지금의 프로 야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최동원선수는 이 시기의 중심 인물로, 그의 이름은 많은 야구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 최동원과 관련된 여러 후보 중 하나로, 사직 야구장 앞에 위치한 그의 동상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 최동원의 동상을 보고 느낀 전율은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의 마이클 조던 동상을 보았을 때의 감동보다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 서울 야구장에는 최동원의 동상과 같은 유사한 동상이 없으며, 이는 부산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동상이다.

 

3. 🏆 최동원 동상의 의미와 선수로서의 역량 [00:08:36] (6분)

  • 최동원 동상은 2011년 부산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최동원을 기리는 상징적 설치물이다.
  • 동상은 최동원의 특유의 폼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부산시민들과 팬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 최동원은 처음에 축구를 시작했으나, 고등학교에入학하면서 야구로 전향해 주목받는 선수가 되었다.
  • 1974년, 그는 팔 보험을 들어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고, 이는 한국의 스포츠 보험발전에 기여하였다.
  • 최동원은 경기 중 노-hit 노-run 기록을 세운 뛰어난 선수로, 이 기록은 고교 시절 최고의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된다.

 

 4. ⚾ 최동원 투수의 전설적인 경기와 모습 [00:15:33] (17분)

  • 1984년 한국 시리즈 7차전에서 최동원선수가 삼성의 우승 예상과는 달리 롯데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역사적인 경기였다.
  • 최동원선수는 당시 7차전에서 매우 힘든 상황에서도 출전했고, 경기 중 피로로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마쳤다.
  • 최동원은 피로로 인해 본인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팀을 위해 강한 정신력으로 경기에 임했다.
  • 그는 한국 시리즈에서 4승을 이룬 투수로서 그의 업적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진정한 " 불멸의 우승"으로 평가된다.
  • 최동원선수는 엄청난 투구량과 강속구 투수로 알려졌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훈련이 필요했다. 그의 라이벌인 선동열과의 대결은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라이벌로 여겨진다.

4.1. 전설의 경기를 회상하다 [00:15:33] (1분)

  • 모두가 기억하는 명경기 중 하나는 1984년 한국 시리즈 제 7차전 경기이다.
  • 당시 삼성이 대세로 여겨졌고, 전문가들은 모두 삼성의 승리를 예측했으나.
  • 롯데와 최동원이 예상을 뒤엎으며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으며, 이는 경기의 상징적인 순간으로 남아 있다.
  • 경기에서 특별한 작전이 있었고, 최동원은 코치의 지시로 승리를 책임져야 했다.
  • 그 당시의 심리와 압박감은 그 경기를 생생히 기억하게 했다.

4.2. 전설의 경기가 시작된 순간 [00:17:05] (2분)

  • 1984년 한국 시리즈 7차전에서 롯데와 삼성은 게임 스코어 3대 3으로, 단 한 경기만이 남겨둔 상황이었다.
  • 최동원선수는 경기 초반에 제구가 잘 되지 않았고, 많은 몸에 맞는 공과 안타를 허용하며 지쳐갔다.
  • 코칭 스태프도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최동원을 계속 믿고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 관중은 최동원의 표정 변화와 경기 중 전개를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 중 홈런이 터진 순간의 긴장감이 웅장한 드라마의 시작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었다.
  • 최동원이 경기에서 우승하는 장면은 그의 이후 인기도를 끌어올린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4.3. ️ 최동원의 투혼과 1984년 롯데 우승의 의미 [00:19:13] (3분)

  • 최동원선수는 경기에서 극도의 피로를 느끼면서도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그가 마운드에서 겪었던 피로감의 극치를 나타낸다.
  • 그는 경기 종료 후에도 힘든 상태에서 축제를 즐겼으나, 많은 선수들이 그의 모습에서 감명을 받았고, 최동원은 "축성이 끝난 후 바로 잠을 잤다"고 언급하였다.
  • 1984년 롯데의 우승은 약자의 승리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여겨지며, 이는 다른 팀들을 압도하지 않고 열정으로 이룬 결과다.
  • 또한, 1984년 최동원의 4승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이후 한국 시리즈에서 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 이와 같은 그의 정신력과 팀을 위한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며, 불멸의 우승으로 간주되고 있다.

4.4. 최동원과 선동열의 역사적인 대결 [00:23:00] (6분)

  • 최동원선수와 선동열선수는 자존심을 걸고 무려 15이닝 동안 대결을 펼쳤으며, 경기는 2대 2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 1987년 롯데 자이언스와 해태 타이거즈의 부산3차전에서 두 선수는 선발 투수로 맞붙었다.
  • 양 팀 감독은 선수들에게 빨리 마운드를 내려오라고 요청했지만, 두 투수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경기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 이 대결은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로 여겨지며, 경기의 결과는 지역 및 기업의 매출에도 영향을 미쳤다.
  • 최동원선수는 한 시즌에 200 이닝 이상을 던졌으며, 이는 현재 리그의 경기에 비해 매우 높은 수치이다.

4.5. 최동원의 선수 관리와 생활 습관 [00:29:55] (2분)

  • 최동원선수는 부상 위험을 안고 있으며, 철저한 자기 관리로 부상을 지연시켰다.
  • 그가 즐겨 입던 트레이닝복은 평소에 편안한 복장을 고수했음을 보여주며, 이에 대해 가족이 직접 외출하여 옷을 사 입히려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 최동원선수는 음식 면에서 특별한 보양식을 챙기지 않으며, 주로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했다.
  •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음주는 거의 하지 않았고, 반면 선동열선수와는 대조적으로 적은 양의 음주로 유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최동원선수의 훈련에 대한 열정과 자기관리는 그의 선수 생명을 연장하는 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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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최동원 선수의 야구 교훈과 메이저리그 진출 과정 [00:32:43] (12분)

  • 최동원선수는 한국 야구사에 세 가지 교훈을 남겼으며, 첫 번째는 에이전트 개념을 가족인 아버지에게서 배운 점이다.
  • 그는 일본에서 배운 새로운 코칭법과 트레이너법을 아버지에게 가르쳐주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어깨를 보호할 수 있었다.
  • 투수는 공을 던지는 보증인과 수비수의 역할이 있음을 인식했으며, 첫 번째로 투구수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다.
  • 최동원선수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후 메이저리그계약이 있었으나, 정치적 반대로 인해 출국하지 못했다.
  • 그의 메이저리그계약은 토론토 블루 제이스와 체결되었으며, 한국에서의 야구사랑으로 인해 부산에 머물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5.1. 최동원의 한국 야구사에 미친 영향 [00:32:43] (3분)

  • 최동원선수가 한국 야구사에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에이전트 개념의 도입으로, 그의 아버지인 최식 씨가 에이전트 역할을 했던 점이다.
  • 그는 일본에서 배운 새로운 코칭법과 트레이너법을 통해 어깨 보호와 투구법을 개선했으며, 이는 그가 경기를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최동원선수는 한국에서 최초로 투구수 개념을 생각한 인물로, 팬들 의식으로 인해 마운드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최동원의 금태 안경은 팬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이는 그의 강한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 부산은 최동원덕분에 야구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뛰어난 능력과 함께 내면의 아픔을 참아내며 이룬 노력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5.2.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계약 이야기 [00:36:17] (3분)

  • 최동원선수는 메이저리그최초로 스플릿 계약을 통해 입단 계약서를 쓴 선수이며, 그의 계약은 메이저 리그 계약이었다.
  • 그 당시 메이저리그계약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선수들과 달리, 최동원선수는 계약서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 많은 메이저리그구단이 최동원선수를 관찰하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토론토 블루 제이스가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 그러나 분리 독립적인 정치적 이유로 인해 최동원선수는 캐나다로 갈 수 없었고, 이는 한국 프로 야구의 태동 시점과 관련이 있었다.
  • 병역 문제로 인해 정부가 최동원선수를 해외로 보낼 수 있는 지원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메이저리그진출이 좌절되었다.

5.3. 최동원의 부산 사랑과 기회의 땅 [00:39:46] (1분)

  • 최동원선수는 부산에 대한 애정이 강해 원래 계획과는 달리 부산에서 뛰고 싶어했다고 한다.
  • 그는 토론토와의 계약이 있었으나, 여전히 부산에서 뛰고 싶었던 이유가 49%를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만약 최동원선수가 토론토로 갔더라면, 그는 성공했을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
  • 야구팬들은 만약 그가 토론토에서 선진적인 시스템에서 관리받았다면, 20승 가까운 성적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최동원선수의 부산에 대한 사랑은 고맙지만, 그가 더 넓은 기회의 땅에서 경험해 봤다면 어땠을지에 대한 아쉬움도 언급되었다.

5.4. 최동원 선수의 유산과 영향력 [00:41:21] (2분)

  • 최동원선수는 시대의 영웅으로 여겨지지만, 시대가 그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했던 인물이다.
  • 한국인은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의 투구폼 때문으로 추정된다.
  • 외에도 1990년대에 나온 노모 히데오 선수는 더 다이나믹한 투구폼을 가지고 있으며, 최동원선수와 비견될 만한 선수이다.
  • 최동원선수는 뛰어난 신체 조건과 실력을 가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이다.
  • 최동원의 유산은 숫자로 표현되지 않으며, 그 동상은 그의 열망을 자극하고 스포츠의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5.5. 최동원 선수의 정신과 영향 [00:43:22] (1분)

  • 최동원선수는 "컨디션이 아무리 난조를 보이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더라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라며 자신감을 강조했다.
  • 그는 고개를 숙이면 뒤에 있는 야수들도 고개를 숙일 것이라고 생각해, 항상 최전방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 이러한 태도로 인해 최동원선수는 매우 멋진 선수로 인식되며,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인물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 최동원선수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문화유산 후보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 그의 업적은 단순히 스포츠 영역을 넘어 정치나 사회에서도 여운을 남기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원본영상
https://youtu.be/PLGUCYT6P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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