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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충신이었던 이완용은 왜 친일파 매국노가 되었을까? 이완용의 적극적인 찬성으로 체결된 을사늑약

soures 2025. 3. 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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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이완용의 복잡한 정치적 여정과 그가 친일파로 변한 과정을 탐구합니다. 이완용이 처음에는 일본을 반대하며 국제적 지원을 구했지만, 정치적 압박과 개인의 이익 때문에 일본에 협조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특히, 을사늑약과 관련된 그의 결정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며, 그로 인해 국민의 분노와 비판을 샀습니다. 이는 후속 세대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정치적 사건으로, 단순한 배신을 넘어 복잡한 이해관계와 개인적 선택이 얽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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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완용의 초기 외교 역할과 미국에서의 경험 [00:00:07] (2분)

  •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을 미워했다.
  • 그는 미국 주재공사관의 책임자 대리로 약 2년간 근무했다.
  • 당시 그는 미국에서 한복을 입고 생활하며 조미 공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 그의 영어 실력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크게 향상되었다.
  • 이완용의 외교적 역할과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의 정치적 여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 이완용의 외교적 변곡점: 고종과의 관계 [00:02:13] (7분)

  • 이완용은 1890년 대리공사직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이 경험이 그의 정치적 경로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그는 고종의 최측근으로 승정원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약 34살 때 종 2품까지 상승하는 초고속 승진을 이룩했다.
  •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고,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에 대피한 후, 고종을 구출할 작전을 계획했으나 구출 준비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 결국, 1896년 이완용의 주도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외교적 지위가 상승했다.

 

3. 😔 이완용의 정치적 변천과 을사늑약의 체결 [00:09:39] (37분)

  • 이완용은 고종의 최측근 관료로서 처음에는 반일적 입장을 취했지만, 정치적 압박과 개인적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에 협조하게 되었다.
  • 이완용은 불미스러운 정치적 스캔들로 인해 사회적 신망이 하락하며, 일본과의 연합을 통해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하고자 했다.
  • 러일전쟁후 일본의 승리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고종은 이환영을 다시 임명하지만, 대신들과의 모종의 내밀한 협의로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이완용은 결국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을사늑약을 찬성하게 되고,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게 된다.
  • 이후 이완용은 일본의 통치를 지원하며, 자신이 맺은 불명예스러운 조약으로 매국노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3.1. 이완용과 고종의 관계 변화 [00:09:39] (1분)

  • 이완용은 고종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하루아침에 관료직 3개를 수여받아 최측근 관료로 자리 잡았다.
  • 그러나 일본은 고종을 계속해서 압박하며, 자신의 궁궐을 떠나 외국의 보호를 요청한 국왕을 폐위해야 한다는 기사를 공개적으로 게재했다.
  •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백성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이환영에게 사태를 수습 할 것을 명령했다.
  • 이환영은 고종의 명령에 따라 일본 공사에 신문사에 대한 경고를 통해 선동성 기사를 없애려 했다.
  • 이환영은 이후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3.2. 이환영의 명망 추락과 부패 스캔들 [00:11:02] (2분)

  • 이환영은 일본을 철저히 미워하고 경계했지만,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행동으로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게 되었다.
  • 1898년, 이환영이 나라의 이권을 해외에 팔아먹은 사건이 언론에 고발되며 그의 불법행위가 드러났다.
  • 그는 학부 대신 시절에 해외에서 빌린 돈 중 일부를 빼돌려 개인 재산으로 사용하였고, 외부 대신으로 활동할 때는 미국에 뇌물 5만 달러를 받고 철도 부설권을 넘긴 혐의를 받았다.
  • 이환영은 중앙정계에서 제명당했지만, 고정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경송 주변에 머물렀다.
  • 이러한 사건들은 이환영이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다시 중앙정계로 돌아가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3.3. ️ 고종의 외교적 선택과 이완용의 복귀 [00:13:37] (9분)

  • 당시 고종은 자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자신을 황제로 선언하였다.
  •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 후, 고종은 정치적 해결책으로 미국의 지원을 바라는 기존의 측근 이환영을 다시 정계로 복귀시키고, 그의 직위는 고종의 직속 부서였던 특진관이었다.
  • 그러나, 이환영의 정치활동은 일본의 칠리파 세력에 의해 반대받았고, 이로 인해 결국 그의 복귀 기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 1905년 9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대한제국의 권력균형은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고, 고종은 미국의 지원을 간청했지만 해당 지원마저 일본에 우호적으로 변화하였다.
  • 이후, 이완용은 친일파로 돌아서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법무부 장관인 이하영을 통해 일본 공사와의 다리 역할을 부탁하고, 결국 학부대신으로 복귀하였다.

3.4. 이완용의 을사늑약 참여와 그 배경 [00:23:13] (23분)

  • 이완용은 처음에는 을사늑약체결을 반대했으나, 이후 눈치를 보며 찬성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기 위해 군사력으로 압박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했고, 결국 몇몇 대신들이 압박 속에서 찬성을 했다.
  • 최종적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들은 '을사오적'으로 불리며, 이들은 조약 체결 과정에서 법적 절차를 무시했다.
  • 이완용은 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됨에 따라 국민의 분노와 비난을 받았으며, 이를 두고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말'이라며 반박했다.
  • 이완용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국가의 독립을 저버리고, 결국 한일 병합 조약을 제안하는 등 일본에 적극 협조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3.5. 이완용의 매국 행위와 그 영향 [00:46:18] (1분)

  • 이완용은 경술국치로 인해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매국노로 남게 되었으며, 일본의 침략 계획에 기여한 바가 크다.
  • 이후 이완용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며,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강제로 배우게 했고,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은 금서로 만들어 이를 읽지 못하도록 했다.
  • 이러한 행민은 일본에 저항했던 이순신 장군의 위상과 관련된 내용을 숨기려는 것으로, 이완용은 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행동을 보였다.
  • 궁극적으로, 이완용의 행위는 나라를 파는 것을 넘어 한국 민족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음을 보여준다.

 

4. ✊ 안중근의 항일 저항과 결심 [00:47:32] (41분)

  • 안중근은 1905년 일본의 외교권 강탈과 같은 부당하고 치욕적인 현실을 목격한 후, 항일 저항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가족과 함께 해외로 이주하기로 했다.
  • 그는 진남포에서 항일운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한글과 군사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 안중근은 1907년 실패 이후 일본군과의 기습 전투에서 얻은 승리과 역경을 겪으며, 결국 항일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결단을 내리고자 했다.
  • 그는 1909년 동료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맹세하는 단지 동맹을 결의하며, 더 이상 소극적이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 마침내, 안중근은 을사늑약의 책임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했고, 이 사건은 그의 역사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4.1. 안중근의 항일 저항 결심과 가족의 지지 [00:47:32] (4분)

  • 안중근은 국제정세를 파악하며 일제의 부당한 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저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그는 가족과 함께 해외로 이주해 저항 방법을 찾겠다고 제안하였고, 아버지는 이 제안에 동의하며 지지해주었다.
  • 그는 상해에서 한국 동포들을 설득하고자 했지만, 그들의 무관심에 좌절하여 결국 국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귀국 후 안중근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슬픔에 빠지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세운 항일 저항운동의 뜻을 다지기로 결심했다.

4.2. 안중근의 항일운동 시작과 교육의 중요성 [00:51:56] (9분)

  • 안중근은 1906년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향하며, 이는 항일운동을 위한 거점 마련으로 추정된다.
  • 그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펼치기 위해 실력을 갖춘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 안중근은 자신의 집안 자산을 정리하여 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동생과 가족들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 그는 1906년 봄, 도니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이 되었고, 군사훈련과 영어 교육을 통해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 이후, 일본의 고종강제 퇴위 사건으로 인해 보다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결심하게 되었고, 가족을 떠나 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4.3. 안중근의 항일 의거와 패배의 원인 [01:01:45] (20분)

  • 안중근은 1908년 4월에 항일 의군 부대를 조직했으며, 부대는 약 300여 명의 의병으로 구성되었다.
  • 부대는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과의 기습적 공격으로 이겼으나, 결국 영산 전투에서 참패를 당해 300여 명 중 20여 명만 생존하게 되었다.
  • 그는 전쟁 포로들을 국제법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석방했으나, 이 포로들이 부대의 위치를 일본군에 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패배 후 안중근은 동포들에게 다시 희망을 주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 동맹을 결의하여 자신의 결단과 의지를 다졌다.
  • 이후 그는 이또히로부미를 만나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 하얼빈에서의 저격 사건을 통해 반일 의의를 실현하게 되었다.

4.4. ️ 안중근의 공개 재판과 동양평화론 [01:21:58] (7분)

  • 1910년 2월 7일, 안중근의 첫 번째 공개 재판이 열리며 5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리는 등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이는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 안중근은 재판에서 자신이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는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행동했으며, 자신은 국제법에 따라 포로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는 사형 선고를 요청하면서도, 그 이유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 동양평화론의 주된 내용은 청, 대한제국, 일본 세 나라가 상호 주권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를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자료는 일본 국립국회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으로, 단 17쪽의 미완성 상태로 발견되었고, 이는 일제가 그의 요청을 거부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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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안중근의 유언과 가족의 비극 [01:29:23] (6분)

  •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그의 강한 애국심을 대변한다.
  • 그는 죽기 전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에서 자신의 뼈를 고국에 반장할 것을 부탁하며,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춤추며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 그러나 유언은 지켜지지 못하고, 그의 시신은 동생들에게 돌려주지 않으며 일제에 의해 무참히 처리되었다.
  • 이후 그의 가족들은 슬픔에 잠기며, 형의 유언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비통해하였고 그 절망은 일제의 만행의 한 예로 남는다.
  • 안중근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원본영상 https://youtu.be/7u-iCb9AJ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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