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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피라미드 지하에서 거대 구조물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이 주장은 가짜 뉴스이며, 이집트 관계 당국은 그러한 조사나 발견이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
💡 주장이 가짜 뉴스인 근거는 무엇인가?
- 주장을 한 연구자 중 한 명은 이집트학이나 고고학 전공자가 아닌 화학자이다 .
- 주장에 사용되었다는 싸(SAR) 기술은 지하 탐사가 아닌 지표면 구조물 파악에 사용되는 기술이다 .
- 카프라 피라미드 지하 지반은 단단한 석회암 기반이며, 그 정도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다른 구조물은 있을 수 없다 .
- 이집트 관계 당국은 해당 조사에 대한 허가를 내준 적이 없다고 밝혔다 .
이 영상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어떻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공유되며, 각 종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탐구합니다. 성경속 노아의 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닌 나무 함과 같은 피난처로 묘사되며, 그 크기는 현대의 이지스함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합니다. 전문가들은 역사적 검증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징벌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노아의 방주이야기가 종교적 의미외에도 고대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영상을 통해 노아의 방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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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바빌론과 바벨탑의 역사적 의미

- 바빌론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된 문명으로, 신들의 문을 뜻하는 '바빌리'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 바빌론은 역사적으로 세 가지 시기로 나뉘며, 번성한 시대는 한물라비 법전이 등장한 바빌리 시기로, 이 시기에 많은 문화적 성취가 이루어졌다.
-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과 도전을 상징하며, 구약 성경에 등장하여 바빌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은 언어를 나누어 인간의 통일된 노력을 저지하게 된다.
- 바빌론의 탐욕과 자만은 성서에서 자주 언급되며, 이를 통해 바빌론은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얻게 된다.
1.1. 바빌론의 역사와 명칭의 의미
- 바빌론은 기원전 2000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문명이다.
- '바빌론'의 원어는 '바빌리'로, 이는 '신들의 문'을 의미하며, 인간 세계와 신세계의 통로로 여겨졌다.
- 바빌론이 멋진 이름을 지은 이유는 기존의 수메르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한 것으로, 이에 따라 새로운 신을 부각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 바빌론은 도시 명칭이고, 바빌로니아는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 바빌로니아는 크게 세 시대(고(古), 중(中), 신(新))로 나누어 구분되며, 그 중 카시트 시대가 포함된다.
1.2. 바빌론 시대의 발전과 중세 암흑기
- 바빌론 시대는 문화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관점에 따라 번성한 시기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 한물라비 법전이 등장한 바빌리 시대는 매우 발전된 시기로 간주되며, 이 시기에 발굴된 많은 토판이 있다.
- 중간에 아쉬루 제국 시대가 존재했으며, 이 시기에 바빌리는 서아시아의 통치 하에 있었다.
- 바빌리 시대 후에 도래한 중세는 문명 자료가 부족하여 암흑기로 여겨진다.
- 현대인이 인식하는 바빌로니아는 대체로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관련이 있다.
1.3. ️ 바벨탑과 그 문화적 의미
- 바벨탑 이야기는 구약 성경에서 유래된 비유로, 인간이 도전해서는 안 되는 영역을 상징한다.
- 성경의 창세기에는 인간들이 탑을 쌓아 언어의 통일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신이 언어를 여러 개로 나누어 인간의 계획을 저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바벨탑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빌벨'에서 유래하며, 언어가 흐트러지는 장소로 인식된다.
- 유대인들에게 바빌로니아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남유다 왕국의 멸망과 관련된 잔인한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 바빌로니아의 교만과 자만은 그들의 멸망 이유로 성서에 나타나며, 후대 성서에서도 바빌로니아는 음란함과 부정적인 상징으로 묘사된다.
1.4. ️ 바벨탑의 역사적 배경과 해석
- 바벨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메소포타미아지역의 각 도시에는 수호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신전 경내에는 신전 탑이 있었다.
- 바벨탑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나, 성경기록자는 이를 자신들의 해석으로 바꾸어 썼을 가능성이 크다.
- 바벨탑의 원형은 바빌론에 지어진 에테메앙키로, 그 높이는 약 91m로 추정되며 하부 구조가 확인되었다.
- 고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벨탑 이야기를 형성해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1.5. ️ 바빌리와 공중정원의 건축 기술
- 바빌리는 마르이라고 하는 신을 섬기는 신전인 에테메왕키에 위치해 있으며, 이는 하늘과 땅에 기초가 되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 바빌리 도시는 20개 이상의 신전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일반적인 작은 도시의 신전 수와 비교하면 매우 큰 규모이다.
- 공중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실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여러 문헌과 과학적 증거에 의해 확인된다.
- 공중정원은 단순한 하늘에 떠 있는 정원이 아니라, 건물의 옥상에 조성된 정원으로, 높은 위치에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의 기술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 공중정원과 신전은 주로 진흙으로 건축되었지만, 비가 오면 흙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벽돌을 구워 사용해야 했지만, 목재 부족으로 인해 이런 벽돌 사용은 주로 부유층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
1.6. ️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번영 배경
-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쉬루 제국의 영향을 받아 번영할 수 있었다.
- 아쉬루 제국은 기원전 9세기에서 7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 존재했으며, 그 기간 동안 체계적인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 아쉬루 사람들은 장사를 하는 민족으로, 상인 대신 군인을 동반해 약탈을 초래했다.
- 단순한 약탈보다는 속주를 만들고 조공을 받는 방식이 더 이익이었기 때문에 시스템이 발전하게 되었다.
- 7세기에 아쉬루 제국이 무너진 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구조적 변화가 없었다.
1.7.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관계
- 중바빌로니아 시대에 이집트에서 많은 재밌는 기록들이 발견되며, 이는 바빌로니아 왕들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여러 부탁을 했음을 나타낸다.
- 바빌로니아 왕 캐디스만 엘릴이 이집트 파라오 아메라테프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집트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이집트 측에서는 외국으로 시집가는 것을 거절하며, 바빌로니아에게 금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 당시의 근동 정세는 여러 강력한 정치체들이 병립하며 서로 견제하고 동맹을 맺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 이집트는 고대 근동역사 속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1.8. ️ 바빌론의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교훈
- 바빌론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기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 고대 문명으로, 이들의 역사는 현재에도 감명을 줄 수 있다.
- 아슈르 제국은 바빌론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으며,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중심지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보다 바빌론을 더 로망적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제국의 수도로 삼으려 했다.
- 사담 후세인 정권은 정치적 선전술로서 바빌론을 재건하고 그 도시의 이미지를 활용하려 하였고, 이로 인해 바빌론의 위력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 바빌론의 역사적 교훈은 이주민이 되어 지배 세력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이 직면한 어려움과 성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2. 🏛️ 아틀란티스와 그 문화적 맥락

- 성산일출봉은 아틀란티스를 언급하는 맥락에서 언급되며, 관광지로서의 문명의 지속성이 강조된다 .
- 아틀란티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유래한 전설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문명의 붕괴와 관련이 있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다 .
- 17세기 베이컨에 의해 아틀란티스는 과학적 유토피아로 다시 등장하며, 이는 많은 문명이 발견되던 시기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
- 아틀란티스는 문명기록이 희망과 이상향으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고고학적 발견의 속박에서 벗어나 상대적 가치가 부여된 결과로 보인다 .
- 아틀란티스와 관련된 기술적 묘사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역사적 상상력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
2.1. ️ 아틀란티스와 유물에 대한 논의
- 성산일출봉과 같은 지형이 아틀란티스로 언급되지만, 이는 단순한 주장일 뿐이다.
- 산토리니 섬 또한 아틀란티스로 밀어붙이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아직 없다.
-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관념이 아틀란티스 전설 속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지진으로 인한 공포감의 결과일 수 있다.
- 역사적으로 지진과 화산으로 인해 문명이 무너진 사례는 매우 많고, 단순히 이들 자연재해로 아틀란티스를证明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유물이 발견되더라도,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2.2. 아틀란티스의 회자와 음모론
- 플라톤의 이야기가 포함된 아틀란티스는 잊혀진 내용이었다가 다시 등장한 지점이 있으며, 이는 17세기에 베이컨이 신 아틀란티스를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
- 베이컨은 과학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아틀란티스를 자신의 이상향으로 끌어들였고, 이를 통해 아틀란티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
- 아틀란티스의 해석은 개인의 믿음에 따라 다르며, 다양한 자연재해 원인에 대한 논의가 존재한다.
- 그 당시에는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았고, 많은 지역이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어 아틀란티스와 같은 개념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 1882년까지도 아틀란티스와 같은 음모론이 형성되기 쉬운 시대적 배경이 있었으며, 이는 새로운 문명 발견의 연쇄적인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2.3. ️ 고대 전설과 미래 기술에 대한 상상
- 많은 고고학자들이 하고 있는 연구와 논의가 인력 시간 낭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작가는 조선시대 16세기에 남아있는 삼신산 전설을 언급하며, 동해안의 신비로운 섬에 대한 이야기로 과학 기술이 발달한 풍경을 상상해본다.
- 이 전설 속 인물은 동해안에서 표류한 후 돌아왔으며, 그곳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 조선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본 이상한 사슴과 새에 대한 묘사는 현대 기술인 킥보드와 드론 택시로 해석될 수 있다.
- 이러한 상상을 통해 고대 문명이 현존하는 스마트 기술이 있는 아틀란티스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2.4. ️ 아틀란티스의 의미와 필요성
- 아틀란티스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류에게 필요한 이상향을 상징한다.
- 인간은 자신의 이상향을 꿈꾸며 살아가며, 아틀란티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유용하다.
- 아틀란티스는 플라톤이 처음 개념화하였고, 이후 베이컨도 이에 대한 언급을 이어갔다.
- 고고학적으로 아틀란티스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으며, 전설로서의 가치가 중요하다.
- 과거를 좋은 시기로 묘사하는 전설은 객관적인 분석이 발달하기 이전의 생각을 반영한다.
2.5. 노아의 방주에 대한 탐구
- 노아의 방주는 성경에 따르면 하늘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분노를 이끌었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큰 배를 지어야 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 방주는 일반적인 배의 형상이 아니라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난처인 점에서 독특하다. 성서에서는 방주를 ' 테바'라고 쓰며, 이는 나무로 된 함처럼 묘사된다.
- 성경에 따르면 방주의 크기는 약 150~160미터 정도로, 이는 현대 군함과 유사한 크기이다.
- 노아의 이야기와 관련된 전통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전반에 걸쳐 있으며, 이슬람에서는 노아를 예언자로 간주하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이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 이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징벌로 요약되며, 종교 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통해 기원과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
2.6. ️ 노아의 방주에 대한 역사적 논의
- 노아의 방주에 대한 역사적 검증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며, 성서의 기록조차 시기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 기원전 3천 년경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시대에 비해, 목재 선박 제작에 필요한 청동과 그 양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대의 목재 선박은 기원전 210년의 이집트 선박으로, 이는 실제 운영에는 제한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 성서의 기록이 정확하더라도, 비슷한 규모의 선박 제작은 현대 조선공학적 관점에서 불가능하다고 평가된다.
- ' 노아의 방주' 발견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윌리엄 와트는 실존하지 않으며, 실제 인물은 론 와이어트로 간호사 출신이며 고고학자가 아니다.
2.7. 고대 홍수 신화와 그 유사성
- 1916년 러시아 비행사가 발견한 두루피나르 지역은 노아의 방주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출처가 불구명하여 음모론으로 여겨진다.
- 대 홍수신화는 거의 모든 문명권에 존재하며, 한국 한반도에도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그 보편성이 강조된다.
- 홍수신화의 유사성은 인류가 공통된 경험을 했거나 혹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유사한 경험을 통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는 노아의 홍수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디테일에서 일치함을 보여준다.
- 구약 성서와 바빌로니아의 홍수신화는 인간의 중요성에서 명확한 차이를 보이며, 이는 아브라함계통의 종교가 휴머니즘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3. 🌍 역사적 사료와 종교적 신념의 탐구

- 출애굽 사건은 현재 역사적 사실로 간주되지 않며, 이에 대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된다 .
-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신들의 역사 속 이야기를 믿기 때문에 역사성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다 .
- 예수의 탄생 연도에 대한 계산은 역사학자들이 오류를 지적한 바 있으며, 기원전 4년에서 7년 사이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
- 기독교가 서양에서 오랜 시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과학과의 조화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고고학이 발전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
- 진시왕의 무덤에 대한 기록은 불완전하며, 사마천이 쓴 사기와 과거의 무덤들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의심된다 .
3.1. 출애굽에 대한 역사적 논란
- 홍해가 갈라지고 수십만 명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성경에 잘 알려진 사건이다.
- 출애굽 시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길을 물어봐서 40년 동안 헤맸다는 이야기가 있다.
- 이 사건은 구약 성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야기로 여겨지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 지난 200여 년 동안 많은 학자들이 출애굽의 구체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실질적인 기록이나 고고학적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 현재 이집트 학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이집트 파라오의 신원을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3.2. ️ 역사와 종교의 연결 고리
-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이야기를 다루며, 경전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출생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지역에 따라 기념일이 다르게 존재하지만 이로 인한 논쟁은 없다.
- 예수의 탄생 연도에 대한 통념은 로마 태양신 축제와 관련이 있으며, 크리스마스는 이 축제를 대입한 결과이다.
- 예수의 출생 연도는 잘못 계산된 것으로, 본래 기원전 4년에서 7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역사학자들은 확실한 증거로 주장하기보다는, 가능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추정이 포함된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3.3. ️ 이슬람과 역사적 증명에 대한 토론
- 이슬람의 알라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잘 문헌적으로 증명되지 않아도 이러한 논의가 일어난다.
- 최근 20년간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의 고대 문자 발견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이슬람 이전의 표현들이 밝혀졌다.
- 학문적 판단은 항상 잠정적이며, 새로운 데이터가 발견되면 기존 주장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 노아의 방주이야기는 단순한 사실 여부보다 그 메시지에 집중해야 하며, 의미 있는 해석이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 종교적으로 민감한 주제이므로, 언급된 내용이 무리하게 비춰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3.4. 진시황의 미스터리와 의미
- 중국 최초의 통일 황제인 진시황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이는 천체를 의미하는 '황'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는 우주의 왕을 자처한 인물로 여겨진다.
- 진시황은 중국의 역사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며, 그 이전에는 통일된 중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된다.
-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과거의 중국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지역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던 지방자치적 특성을 가진다.
- 화자의 개인적 관심으로, 타임머신이 생기면 진시황을 만나고 싶다는 언급이 있다. 이는 진시황에 대한 높은 흥미를 나타낸다.
- 진시황 시대에 대한 이해는 천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 언급된다.
3.5. ️ 진시황의 통일 의지와 배경
- 중국 통일의 아이디어는 단순함에 대한 선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하나의 궁극적인 이론을 만들고자 한다.
- 진시왕은 순수한 중원의 사람이 아닌, 외부의 오랑캐 출신으로서 변두리에서 중원을 침략했다.
- 그는 통일 후 도량형, 글자, 언어, 법률을 모두 통일시켰으며, 이는 자신의 외지인 정체성과 상반된다.
- 역사적으로 중원을 통일한 통치자들은 대개 외부에서 온 인물들이었으며, 진시왕 역시 기존의 요소들을 연결하여 통합한 특징이 있다.
- 진시왕은 비록 실패했지만, 모든 것을 통합하고 장점들을 모은 과정이 그의 진정한 미스테리로 여겨진다.
3.6. 진시황릉의 신비와 물질의 역할
- 진시황은 무덤을 통해 거대한 규모의 묘역을 조성하고자 했으며, 이는 약 2.1km²에 달하는 면적으로 상상을 초월한다.
- 진시황릉 내부에는 수훈이라는 물질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이 물질은 불사와 연관되어 있으며 고대 문명에서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은 진시황의 신비로운 물질에 대한 설명이지만, 100년의 간극으로 인해 진실 여부에 의문이 제기된다.
- 수훈은 당시 사람들에게 미백 효과와 신비로움으로 인식되었지만, 방사선 피폭의 위험이 있는 성분으로 여겨졌으며 그 기원은 서양에 있다.
- 진시황은 서쪽의 연금술 영향으로 수훈을 선호했으며, 이는 황제의 권력을 통해 무한히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7. 고대 유물 발굴과 보존의 딜레마
- 발굴을 통해 후대에 귀중한 자료를 남기기보다,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발굴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 현재는 첨단 기술을 통해 발굴하지 않고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고 있다.
- 과거 진시황의 무덤 탐사를 하면 많은 중요한 증거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발굴 작업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은 상당한 거리(1.6km)로 떨어져 있어, 둘의 관계가 간혹 오해될 수 있다.
- 진시황 시대의 문화재 보호 정책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문화재 발굴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4. 🏛️ 진시황과 마추픽추: 고대 문명의 비밀

- 진시황에 대한 이해는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통치 아래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중요하다.
- 고고학의 진정한 목적은 과거 인류의 진정한 모습을 탐구하는 것이며, 발굴 대신 보존을 모색하고 있다.
- 마추픽추는 해발 2,700m의 높은 곳에 위치한 신비로운 도시 유적지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지 않았다가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었다.
- 인카 제국은 철기 도구 없이도 정교한 건축 기술을 보여주며, 돌로 만든 도시가 오랜 세월 잘 보존되어 있다.
- 마추픽추가 높은 곳에 위치한 이유는 종교적 목적과 함께 하늘과의 연결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지역의 인명들은 농업 문명 기반으로 발전했다.
4.1. 진시황과 과거, 현재를 잇는 연결 고리
- 진시황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것과 같으며, 그는 우리의 역사에 중요한 사건을 남겼다.
- 발굴을 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며, 이는 세계적인 유산으로서 중요하다.
- 고고학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한 보물이나 미스터리가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둔다.
- 진시왕의 영향력은 오늘날 여러 질문을 던지며, 이는 아인슈타인의 과학 기술과 유사한 맥락이다.
- 현대 과학자들이 과거 이론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진시왕 시대와 유사하게 연계되고 있다.
4.2. ️ 마추픽추의 발견과 의미
- 마추픽추는 해발 2,700m에 위치한 유적지로, 고대 인류가 거주했던 지역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 이 지역은 접근이 어려운 곳에 세워져 있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며,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었다.
- 마추픽추는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어 외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과거의 문명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졌다.
- 마추픽추의 발견자는 하이런 빙엄으로, 원주민의 안내를 받아 탐사를 시작했으나 여러 설이 있어 그 이름의 의미가 논란이 되고 있다.
- 페루의 연구자들은 서구의 학자들과 방향성이 다르며, 인명과 신화를 보존하고자 하여 추가 발굴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4.3. ️ 고대 잉카 문명과 마추픽추의 건설 기술
- 마추픽추의 건설 기술은 돌과 돌이 끼워져 서로 딱 맞춰져 접착제 없이 건축된 점에서 매우 뛰어나다. 이로 인해 구조물이 지진에도 견딜 수 있게 되어 있다.
- 인카 제국은 15세기 이전까지 철 도구 사용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돌을 다듬어 맞추는 독특한 방식으로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인카 문명의 수도가 해안에 위치하지 않고 높은 지역에 세워진 이유는 지진과 쓰나미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 고대 인카 사람들은 자연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들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통해 기후와 농업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환경을 존중했다.
- 마추픽추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종교적 의미와 자연 경관이 중요했던 지역으로 추정되며,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고비용의 건축을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4.4. ️ 잉카 제국과 엘도라도의 전설
- 안데스 지역에는 기원전 5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최초의 인간이 거주한 기록이 존재하며, 이후 잉카라는 통일된 왕국이 형성된다.
-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타우 알파라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엘도라도"의 전설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황금으로 가득 채워진 방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을 얻었다.
- 잉카 사람들은 문자가 없었고, 기호와 줄 묶기로 의사소통했으며, 철도구들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뛰어난 건축 기술과 경제력을 발휘하며 번영하였다.
- 빠차구티 왕이 통치할 당시, 잉카 제국은 30개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종족을 통합하여 대왕국을 건설하였고, 그 지역의 풍부한 자원 덕택에 지속적인 부를 창출하였다.
- 잉카 제국의 농업 문화는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영향을 미쳤으며, 코카콜라와 같은 음료에도 잉카의 농작물인 코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4.5. 잉카 문명과 칠레의 역사적 배경
- 페루와 칠레 지역의 사람들은 잉카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인카는 페루의 중심 문명이었음을 강조한다.
- 칠레는 남미에서 경제가 가장 안정적이며, 독립 의지가 강하고 페루보다 먼저 독립을 이룬 지역이다.
- 19세기 말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가 승리, 아타카마 사막을 차지하게 되어 페루의 자원이 큰 타격을 받았다.
- 칠레 거주 인구는 인카 유적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며, 이는 국가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 인카 문명은 남미에서 가장 큰 문명으로, 농업과 세금 제도를 기반으로 한 경제 체계가 발전했다.
4.6. 고대 문명과 인신 공양의 역사
- 잉카제국과 같은 고대 문명에서는 미라와 인신 공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는 특정 의식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마추픽추 지역은 주요 거주지가 아닌 재를 올리는 곳으로 추정되며, 대다수 시신이 여성인 점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 중남미 문명에서 인신 공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이는 특정한 상황과 연관이 깊다.
- 한국에서도 인신 공양의 역사가 있었으나,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고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이러한 풍습은 사라졌다.
- 잉카 제국의 멸망 원인은 무기와 기술의 차이와 내적인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외부의 침략에 쉽게 무너졌기 때문에, 이는 인신 공양과 같은 풍습을 빠르게 개선해야 했던 배경을 암시한다.
4.7. 고대 불가사의와 한국의 금 생산
- 고대 잉카제국의 이야기는 기록과 기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된다. 특히, 피사로는 내분 소문을 듣고 기회를 포착한 사례로 언급된다.
- 기록이 남지 않으면 외지인에게는 미스터리가 되고, 현지인들에게는 문화 정체성을 상실하게 할 수 있다.
- 한국과 남아메리카는 거리가 멀지만, 사실 태평양 건너면 남아메리카가 존재하여 교류의 필요성이 있다.
- 한국에서 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은 울산이며, 아연과 구리 수입 시 불순물로 금이 생성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 한국의 아연 및 구리 회사들은 남아메리카의 광석을 수입하며, 한국과 남아메리카의 관계가 앞으로 더욱 가까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4.8. 만리장성의 역사와 미스터리
- 만리장성은 약 2,700km로 추정되며, 최근에는 6,300km에 달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중국에서는 줄여서 장성이라고 불리며, 영어로는 Great Wall로 번역된다.
- 만리장성 건설의 시작은 그전의 성벽 쌓기부터 존재했으며, 진시왕이 고대 군주국의 성벽을 연결하고 업그레이드하여 현재의 장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 진시황은 만리장성 건설을 통해 국가 통제를 강화하려 했으며, 이는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 만리장성은 역사적으로 방어의 효과가 제한적이었다고 추정되며, 이는 진나라 이후에도 외부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던 것을 통해 확인된다.
- 만리장성의 상징적인 의미는 주류 중국 문화와 비주류 문화 간의 경계를 나타내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의미는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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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만리장성과 고대 중국의 역사적 교훈

- 2012년까지 장성 공정 모니터링을 했으나, 중국의 보고와 달리 장성의 실태는 주로 흔적만 존재했으며, 실제로는 단순한 둔덕이라고 밝혀졌다 .
- 만리장성의 길이는 최종 21,000km로 늘어났지만, 이 과정에서 실제 장성과는 관련 없는 단락들이 포함되었고, 동북 공정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
- 중국은 역사와 고고학을 21세기 대국 확장을 위해 활용하고 있으며, 만리장성이 그 상징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
- 디지털 만리장성이 다음 단계로 예상되며, 현대 중국의 미래 문명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제기된다 .
- 결국, 만리장성을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현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여지며, 고고학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탐구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
5.1. ️ 중국 만리장성의 현재와 미래
- 2012년까지 만리장성 공정 모니터링을 진행했으나, 실제로 확인된 장성은 없는 것이 많았다.
- 만리장성은 각종 지역의 변두리부터 시작하여 21,000km까지 늘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 중국은 역사와 고고학을 활용하여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땅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지들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역사 왜곡을 야기한다.
- 디지털 만리장성의 개념이 등장하며, 이는 중국의 미래 문명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생각된다.
5.2. 정치와 방어 시설의 관계
- 문무왕은 신라에서 삼국을 통일한 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방어 시설인 성벽을 많이 건설했다.
- 의상 대사는 정치가 잘 운영된다면 사람들은 외부의 위험을 인지하고, 그러므로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성벽을 쌓아도 사람들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 이러한 이야기는 과거 문헌인 3국 유사에 등장하며, 역사적 교훈으로 여겨진다.
- 고고학은 과거를 통해 현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이며, 만리장성은 21세기 중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유물이다.
5.3. 이집트 피라미드 지하 구조물 발견
- 최근 이집트 피라미드 지하에서 거대 구조물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 발견된 구조물은 굵직한 기둥 모양으로, 지하 600m 깊이에 여덟 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이 과정에서 합성 개구 레이더를 활용하여 지하 탐사가 진행되었으며, 이 결과가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 피라미드 지하 깊이는 한국의 가장 높은 빌딩보다 더 깊은 수준으로, 이는 제작 목적이나 의미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 피라미드의 역할이나 그 범위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인다.
5.4. 피라미드 관련 가짜 뉴스의 문제점
- 황당한 뉴스가 이집트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유포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다.
- 주장을 한 연구자들인 코라도 말란 박사는 화학 전공으로 피라미드 연구와는 관련성이 낮다.
- 사용된 기술인 싸(SAR)는 지하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표면의 구조물을 파악하는 데 쓰인다.
- 이집트 관계 당국은 이러한 가짜 뉴스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였고, 조사에 대한 허가가 없었다고 언급했다.
- 가짜 뉴스의 주장은 과장된 표현과 허위 정보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제 조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5.5. 피라미드의 명칭과 역사적 의미
- 피라미드라는 용어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리스의 빵 모양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 쿠프왕의 피라미드는 약 4,500년 전에 건설되었으며, 높이는 약 140m로, 현재 MBC 건물의 두 배에 해당한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고 놀라움을 느끼고, 그 모습을 관찰하며 피라미드를 '피라미스'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 18세기 조선의 상봉이라는 인물은 청나라에서 유럽의 지식을 접하고, 이집트에 대해 기록을 남겼으며, 이를 북원록이라고 부른다.
- 그 기록에는 이집트를 '애길'이라고 하고 첨형고대로 묘사하였으며, 이는 높은 대의 첨탑 모양을 의미한다.
5.6.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구조와 신앙
-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화강암, 석회암, 그리고 하얀색 석회암을 사용해 건설되었으며, 하얀 석회암은 외부 포장용으로 사용되었고 내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피라미드는 동서남북을 정렬하여 건설되었으며, 입구는 항상 북쪽에 위치해 있어 북극성과 별 신앙과 관련이 있다.
-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가진 형태로, 길이가 70m, 높이는 20m로 이집트 내 다른 석상보다 크다.
- 스핑크스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과 관련된 신앙을 상징하며, 자신의 태양신적 존재를 주장하는 내용을 포함한 비석이 남아 있다.
- 스핑크스의 침식 흔적은 비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12,000년 전의 환경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5.7. 고대 이집트 무덤 발견과 탐사의 진실
- 103년 만에 발견된 8호의 무덤은 진짜 뉴스로, 투트머스 2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왕들이 묻히는 왕들의 계곡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 무덤의 구조는 18왕조 초반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내부에는 별을 그린 오각형 벽화와 투트머스 2세와 그의 부인 하세트의 이름이 담긴 유물이 발견되었다.
- 그러나 언론 보도에서 103년의 기준이 부정확하며, 이 시기 동안 다른 왕묘들이 발견된 사례가 존재함을 지적했다.
- 발굴 당시 상처받은 유적들이 있었고, 도굴된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이는 일반적이라는 점도 언급되었다.
- 이집트 정부의 발표는 과장된 언어를 사용해 관광 산업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분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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